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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사제직과 함께 할 수 있는 은수 생활
17. 그들은 은수 생활이 미사성제를 드리는 사제의 사명과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이를 우리에게 납득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생각이고 오히려 은수 생활과 사제직은 서로 잘 맞는다는 것을 증명해 줄 수 있다고 확신한다. 나는 그들에게 내 생활을 범죄로 몰아가려고 하는 현실을 보여주면서 은수 생활이 전례를 거행하는 사제의 사명과 얼마나 잘 맞는지 보여주려고 한다.
18. 교회는 목자들 중의 한 사람인 주교로 하여금 내 머리위에 손을 얹게 하여 인격체에 활기를 주는 주님의 영이 나를 다른 사람으로 곧 성직자들 중의 한 사람으로, 제단을 맡아보는 하느님의 대표들 중의 한 사람으로, 높으신 분의 사제로 변화시켰다.
19. 첫 미사 때에 백성이 바치는 기도의 향기를 하느님께 봉헌하려고 손에 향로를 들고 제대의 계단을 올라갔을 때 [묵시8,3 참조] 내 조국은 뼈만 남은 시체로 뒤덮인 묘지였다. 나는 내 직무인 제단을 맡아보는 성직자로서 내 형제들인 성소(聖所)의 성직자들과 함께 시민들의 피로 칼을 더럽힌 복수하는 악마들과 싸우려고 약속하였다.
아무 무기도 지니지 않은 채 전쟁터에 나갈 수는 없었으나 철과 강철로 된 무기들은 내게 아무 쓸모가 없었다. 내 싸움은 살과피를 대항하여 싸워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퍼져있는 암흑의 권세와 세력과 지배자들과 싸워야 했다.[에페 6,12 참조] 나는 주님의 성전에 있는 병기고에서 십자가, 고복(苦服), 고행대(苦行帶), 보속, 가난과 더불어 기도와 복음 설교와 같은 영적인 것으로 완전한 무장을 갖추었다.[에페 6,13 참조]
20. 처음에 나는 내 조국 시민들과 형제들이 처해있는 문제만 도와주려고 했다. 그러나 스페인 혁명은 피레네 산맥 맞은편으로 나를 내뱉었고, 유배지인 스페인에서 벌어지는 무시무시한 대학살을 자행했던 칼이 가톨릭 믿음을 고백하는 다른 나라를 같은 칼로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하느님께서 교회와 사회를 위해 섭리하신 계획을 흐트러지지 않는 마음으로 관상하려고 매우 황량하고 거칠고 쓸쓸한 곳에 자리 잡고 살기로 결정하였다.
21. 제단에서는 본당을 대표하는 사제가 필요하듯이 지상에 존재하는 인류사회의 거대한 군종 역시 하느님 앞에서는 작은 백성이기에 하느님의 옥좌 앞에서 백성을 대표하는 사제가 필요하다. 이런 생각에서 보편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로마 교회의 사제이며 제단에서 교회를 대표하는 사람들 중의 한 사람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아버지[묵시 4,2 참조]의 옥좌 앞에서 파견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으로서 내 눈앞에 놓인 교회가 당면한 처지를 방어하는 것이 고독 속에 살고 있는 유일한 목적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이 목적은 각 나라의 개인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므로 보편 교회의 이익과 연결되었을 때만 개별 나라를 방어할 수 있다. 다행히 내 유배지는 한 나라의 이익만을 위하게 하려는 위험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나를 해방시켜 주었다.
22. 은수생활 양식을 마치 이단자를 단죄하듯이 공격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나는 지상 깊숙한 곳에 자리한 그윽한 침묵을 찾으려고 큰 바위틈과 바위굴과 동굴에 들어 간 사실을 [묵시 6,15 참조] 숨기지 않고 고백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어두침침한 곳에 내 생활을 매장하는 것이 지상에서 생활하는 것보다 내 정신을 덜 흐트러지게 하였다.
어두침침하고 쓸쓸한 동굴 속에는 삼나무의 거만을 넘어뜨리며 윽박지르는 번개소리나 산맥을 휘몰아치는 격렬한 바람이나 바위위에 떨어지는 물의 속삭임도 전혀 들리지 않았으며 목자들의 휘파람과 숲 속 멀리서 짖어대는 짐승소리와 새의 노래까지도 지극히 고독한 은둔소 어귀에는 모두 사라져 버렸다.
마을과 멀리 떨어져 있어서 시끄러운 차 소리도, 친구들에게 놀자고 부르는 아이들의 고함소리도, 종소리도, 상인들이 외치는 소리도, 직공들이 바쁘게 일하는 소리도 그 어떤 것도 내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다.
23. 나는 기도생활을 위해 다른 어떤 곳보다 이 지독한 고독을 더 좋아했으며, 바로 내가 여기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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