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부록 1” 에 계시되어 있는 [덕행학교 제2부(호교론)] 의 미완성 기본 구상을 통해서 빨라우 신부가 교회와 신앙생활을 위협한다고 보아 대적하고 있는 당시의 시대적 사조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를 엿볼 수 있다. 그는 이 호교론을 통해서 덕행 학교 학생들에게 이론적 무장을 강화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호교론] 은 『덕행교리서』 가 52과로 구성되어 있는 것에 호응해서 역시 52개 명제로 세분해서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빨라우 신부가 대적하고 있는 사조들이 매우 광범위한 것들임을 알 수 있다: 절충주의, 회의주의, 무관심주의, 무신주의, 물질주의, 영성주의 (또는 唯心主義 ),범신주의, 일위신주의(一位)神主義, Unitarianism), 자연적 유신주의, 이신주의 (理神主義), 개신교, 숙명주의 또는 결정주의, 자연주의, 유대교, 철학주의(또는 합리주의), 종교관용주의, 자유주의, 공산주의, 사회계약설, 반성직주의, 반권위주의, 반수도회주의 등. 그는 까다롭고도 교묘한 그릇된 입장들의 핵심 명제를 지적하고, 그에 반대하여 가톨릭의 정통 가르침을 적시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근대 철학의 흐름을 잠시 일별할 필요가 있다. 스콜라 철학의 전성기가 지나자 여기저기서 상대주의적이고 회의주의적인 경향이 나타났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죽은 뒤 스콜라철학이 급속히 쇠퇴해간 모습은 고대철학에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죽은 뒤 탐구의 활력이 꺼져버린 것과 흡사하였다. 성 토마스의 위대한 공적은 신앙과 이성의 일치를 정립 하였던 것이지만, 스코투스에 이르러서는 벌써 이를 의문시하였고, 오컴의 명목주의에 와서는 심지어 신앙과 이성이 서로 모순된다고까지 주장하게 되었다.
근대에 이르러 이성은 스스로의 능력을 과신한 나머지 신앙과 결별한 채 자신만의 힘으로 만사를 해결하겠다고 나섰고, 새로운 철학을 한답시고 인간 인식의 능력과 한계에 관해서조차도 서로 모순되는 갖가지 주장들이 난무하게 되었으며, 이런 새 것을 추구하는 사조는 가톨릭 철학자들 사이에서도 번지고 있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교황과 교계제도에 대해 억누를 수 없는 격렬한 증오심을 품고 있었고, 그래서 그는 부당한 모든 권위를 철폐하고 직접 그리스도께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또 다른 종교 개혁자인 칼빈은 과학, 문학, 미술 등 근대정신의 산물들을 매우 싫어하였다. 원죄 때문에 근본적으로 부폐해버린 인간성에 대한 그의 증오는 극도에 달했다. 따라서 성상(聖像)을 파괴하고 청교도(puritanism) 사상을 내세웠다. 그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하느님의 권능에 반대된다고 보아 부정하였다. 칼빈의 인간상은 이성은 맹목이고, 감정은 부패하였으며, 의지는 자유가 없는 인간이다. 은총도 사람의 영혼 속에 들어가 그것을 고칠 힘이 없고, 다만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그리스도의 공로가 인간을 옹호할 수 있을 뿐이다.
가톨릭 신학자들은 프로테스탄트들이 제기한 교리 문제들 때문에 성경과 사도전승, 그리고 신학 체계 등을 근본적으로 재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투쟁의 시기에 성토마스의 업적들이 재평가되기 시작하였다. 트렌토 공의회(1545-63) 는 성토마스의 가르침과 정신을 가지고 교회 내 쇄신 운동을 일으켰고, 가톨릭계 대학에서의 철학과 신학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이 기간 중에 설립된 예수회를 비롯한 수도회들은 한결같이 성토마스를 가톨릭교회의 공식 스승으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17세기의 새로운 과학(갈릴레이와 뉴턴)과 새로운 철학(데카르트)은 토미즘에 도전한 것을 넘어 그것을 고립시키고 말았다. 스콜라 철학은 트렌트 공의회 이후 채 한 세기도 지나기 전에 그 고유한 활력을 상실하고 있었다. 도미니코 회원들은 토마스의 가르침을 충실히 견지하였지만, 예수회 회원들은 점점 더 그들의 관심을 광범위하게 확장시켜 나갔다. 수아레즈(1548-1617) 이후로 철학과 신학은 거의 완전히 분리되어 버렸다. 17세기 말경 토미즘은 교회 계통의 학교들에서만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그 철학은 주로 신학 영구의 예비학 정도로 활용되고 있었고, 라이프니츠와 볼프의 ‘본질주의적’ 정서로 기울고 있었다. 토미즘은 차츰 발전되어 가는 근대 과학과 철학으로부터 고립되었고 또 성토마스 형이상학의 핵심 가르침은 ‘존재(esse) 관념을 상실함으로써 쇠퇴 일로를 걸어 17세기말부터 19세기 중반 부흥 운동에 이르기까지 거의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시기 동안에는 전통적인 이론들에 근대의 합리주의적 개념들이나 감각 주의적 주장들을 섞어 혼합하는 수준 낮은 절충주의로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었다.
19세기의 다양한 세속 주의적 사조들의 뿌리에는 반 형이상학적 태도가 자리 잡고 있다. 물질주의와 실증주의가 대세였다. 헤겔의 죽음(1831)과 더불어 고대철학부터 중세철학을 거쳐 (비록 변질 과정을 거치는 중이기는 하더라도) 칸트 이후의 철학자등에 이르기까지 형이상학적 탐구라는 하나의 줄로 연결되어 있던 서구 철학 활동 전체가 일단락되는 것 같았다. 형이상학이 몰락하자 콩트, 마르크스, 프로이트, 니체와 같은 사상가들이 정중하게 그 장례식을 치렀다. 쇼펜하우어는 절대자가 이성이 아니라 맹목적이고 비합리적인 의지의 충동이라고 주장하였고, 콩트는 과학의 이름으로 형이상학과 종교를 부인하고 대신에 인류교(人類敎)를 세웠으며, 포이에르바하는 신학을 인간학으로 변형시켰고, 다윈은 기계론적 진화론을 제창하였다. 마침내 니체는 신의 죽음을 선포하고 인간 만세를 외쳤으며, 프로이드는 인간의 심리생활을 결정하며 움직이는 것이 맹목적 성욕인 리비도라고 주장하였다.
이리하여 19세기 말경 서구 세계 전체는 생활 전반에 걸쳐 총체적 위기에 빠진다. 그 시대를 사로잡고 있던 낙관주의적 진보주의가 더 이상 자명한 설득력을 잃고 말았다. 이런 위기의 뿌리는 그릇된 합리주의, 이성에 대한 맹신,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 상실에 있었다.
당시 가톨릭 교수들은 일반적으로 현대 철학이 제기하고 있는 문제들과 요구들에 직면해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고, 따라서 스콜라 철학과 데카르트 철학 및 관념주의 철학을 뒤범벅 시켜 다루는 절충 주의적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교도권이 19세기 중반 이래로 더욱 자주 발언을 하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그 시기에 적지 않은 가톨릭 신앙인들이 자기 나름의 철학을 지닌 채 다양한 철학 사조들을 맞닥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교도권은 이 철학 체계들이 그 자체로 그릇된 길로 일탈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했다. 한편에서는 맹신주의(fideism)와 급진적 전통주의(radical traditionalism)가 이성의 자연적 능력들에 대해 불신하였고, 다른 한편에서는 합리주의(rationalism)와 존재직관주의(ontologism)가 오직 신앙의 빛만이 전해줄 수 있는 지식들을 자연 이성에 돌리려고 하였다.
교도권의 발언들은 개별 철학 주제들보다는 신앙을 이해하기 위한 합리적이고 철학적인 인식의 필요성에 역점을 두었다. 온갖 형태의 합리주의를 거슬러 신앙의 신비들과 철학의 발견들 사이의 차이와, 철학적 발견들에 대한 신앙의 신비의 초월성과 우위성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신앙이 이성보다 상위에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신앙과 이성 사이에 진정한 의미의 상위와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진리는 진리에 모순될 수 없기 때문이다.
교도권이 철학 이론들의 오류나 일탈들만 지적한 것은 아니다. 진정한 철학 쇄신의 기본 원리들을 천명하기도 하였다. 교황 레오 13세는 회칙 「영원하신 아버지」(Aeterni Patris) 에서 교회 생활을 위해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일보를 내디뎠다. 이 위대한 교황은 철학적사고가 신앙과 신학에 얼마나 깊이 공헌하는지를 보여주었다. 특히 성토마스의 철학이 지니고 있는 그 어느 것에도 비할 수 없는 가치에 관한 강조는 여전히 유효하다. 천사 적 박사의 형이상학적 사상을 쇄하는 것이야말로 교황에게는 신앙의 요구들에 부합되는 철학의 활용을 활성화시키는 최선의 길로 여겨졌다.
“성토마스의 거룩한 가르침을, 가톨릭 신앙을 옹호하고 영예스럽게 만들며 사회의 선익이나 모든 학문을 증진시키는데 다시 활용하고 또 그것을 널리 확산시키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권고하는 바입니다.”
인간에게 어울리는 삶은 관조적인 삶도 아니고 육체의 쾌락에 매여 사는 삶 도 아니다. 관조적인 삶은 천사에게 어울리는 삶이고, 쾌락을 따르는 삶은 금수에게나 어울리는 삶이다. 인간에게 어울리는 삶은 도덕적인 덕을 실행하는 삶이다.
빨라우 신부님은 이렇게 말한다: “덕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을 추구해야 하고, 추구하기 위해서는 사랑해야 하며,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 가치를 인정하고 귀히 여겨야하며, 또 그럴 수 있기 위해서는 덕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덕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의 소중함을 깊이 깨달아 그것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때 비로소 덕이 취득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이 『덕행교리서』는 가톨릭교회의 도덕 원리들을 놀랄만큼 압축적으로 요약하여「문답교리서」의 형식으로 제시하고 있다. 요약은 언제나 장점과 단점을 모두 지니고 있다. 단점이라면 무엇보다도 내용이 빈약하고 설명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부족을 감수하면서까지 요약하는 작업 결과의 이점은 휴대가 간편하고 암기가 용이하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빨라우 신부님의 각고의 수고 덕분에 수중네 넣게 된 이 『덕행교리서』를 통해 많은 이들이 우리 시대에 절실히 요청되는 덕(德)을 체득하는 기회가 되길 소망한다.
이재룡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