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聖)오노라또 은둔소
1867년 3월 12일
1. 거울
2. 거울을 통해 보는 교회 순결성
3. 거울을 통해 보는 형상 또는 형상화한 그림자
4. 거울 앞에서의 실재
5. 빛
6. 거울을 통해 보는 형상화한 그림자 안에 있는 실재의 환시
1. 12월 8일부터 오늘까지 내 영혼이 몹시 흥분이 되어 거의 숨 쉴 수조차 없었다. 하느님께서 내게 당신 손을 주지 않으시면
영혼은 하느님께 향할 수 없다. 님을 불렀으나, 너무나 고통스러워 옥죄인 심장에서 울려 나와서 그런지 내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 사랑은 마치 잿더미 속의 불씨 같았다. 하느님께서 지켜주지 않으시면 전부 다 잊어버리기가 얼마나 쉬운지!
이렇게 무거운 마음으로 성 오노라또 은둔소를 방문하러 왔다. 깎아지른 듯 가파른 절벽 가장자리 위에 세운 내 고독한
수방에 은신하였다.
2. 내 수방에서 로마에서 보았던 모든 것을 되돌아보며 기도 중에 계속해서 하느님과 무섭게 씨름을 하였다. 나는 이 씨름에
철저히 몰입하여 걱정하느라 내 님과 사귀는 사랑의 감미로움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거센 바람이 불어와 절벽 끝에 세운
내 수방을 때리더니 마치 수방을 뿌리 채 뽑아 지옥에 던져 버릴 듯하였다. 달빛은 겨우 구별만 할 정도의 등잔불과 비슷하여
창문의 유리를 통해 물체와 어두운 물건을 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편안한 휴식을 즐겼고 이미 지나간 끔찍한 풍랑 후의
평화로운 고독을 음미하였다. 밤의 침묵 속에서 수없이 내 님을 불렀다. 로마를 향한 여행부터 하느님하고 씨름 한 일은 마치
마음 속 사랑의 불꽃이 거의 꺼져 가는 것처럼 내 마음을 초조하고 착잡하게 했다.
3. 이러한 상태로 수방에서 나왔다. 그런데 바람이 성난 폭풍과 같이 나를 사로잡아 내 수방으로 하마터면 돌아오지 못할
뻔하였다. “들어와서 문을 잘 잠그십시오.” 다정하고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어떤 목소리가 힘차게 말했다.
라반의 딸
- 당신은 누구십니까?
- 어서 들어와 문을 닫으십시오.
같은 목소리가 반복해서 말했다.
- 안에 누가 있습니까?
- 나입니다.
- 당신은 누구십니까?
- 나는 라반의 딸입니다.
- 당신이 그 아름다운 라헬입니까?
- 나는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일치한 모든 성인과 의인들의 집회(la congregacion)입니다.
- 거룩한 교회여, 티없으신 동정녀여, 당신의 팔을 벌려 당신의 가슴에 이 불쌍한 순례자를 받아 주십시오!
내 비둘기여, 사멸할 인간의 눈에 더는 내가 보이지 않게 해 주십시오!
4. 달콤한 사랑을 즐기면서 나는 수방 창문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창문을 통해 희미한 달빛으로 이 산 정상부터
물체와 그림자로 덮인 농장을 바라보았다. 늘 그랬던 것처럼 형상을 지닌 한 그림자가 내 앞에 나타났다.
16살의 양치기 아가씨 모습을 하고 있었다(창세 29,9)
- 그림자여, 당신은 누구십니까?
- 나는 라반의 딸입니다.
- 아름답고 고운 그 라헬입니까?
- 내가 당신의 님입니다.
- 당신은 그림자입니까? 아니면 실재입니까?
- 나는 형상화한 그림자이고 당신님을 표상하며, 당신님은 실재입니다.
- 내게 말하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림자입니까? 내 님입니까?
- 모두 하나입니다.
- 물러나십시오. 내 마음을 짓누르는 고통이 달콤한 사랑을 즐기지 못하게 합니다.
- 무슨 고통입니까?
- 당신은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내 청원을 허락해 주시려 하지 않습니다. 내 청을 들어주십시오.
내 비둘기여, 당신이 내 청을 들어주십시오! 순결한 동정녀여, 당신 품을 열고서 당신을 사랑하고 경배하는 이 가련한 인간을
당신 팔 안에 받아 주십시오. 왜 나를 이 세상에 내버려둡니까? 내가 무슨 쓸모가 있단 말입니까? 허다한 불행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의 아버지이시며 내 아버지이신 그분은 분노하시어 백성들과 나라들을 치는 회초리를 거두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바라나니 싸움 중에 죽어 사멸할 인간들의 책에서 내가 지워지기를! 내 신부여, 당신의 팔을 벌리십시오. 순결한 동정녀여,
거룩한(승리) 교회여, 당신 품에 아담의 후손인 나를 받아주십시오.
- 당신은 내게 영원히 (영광 안에)안기기를 요구하는군요. 그렇게 하지요.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나를 쳐다보십시오. 내 그림자와 표상이 보입니까?
- 예.
- 내가 누구입니까? 나를 알아보겠습니까?
5. - 당신은 라반의 딸이며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일치한 의인들, 즉 지상에서 싸우는 모든 의인의 집회입니다.
당신은 지상에서 순례하는 교회입니다. 당신은 이 세상의 광야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양떼에게 풀을 먹이는
아름다운 라헬입니다.
- 그 말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나를 버리고 사람들 속에 숨어버리려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이토록 위험한 상황에 처한 나를 버릴 작정입니까?
- 용서하십시오. 사랑하는 라헬. 다시 한 번 당신을 우해 봉사 할 것을 약속합니다.
- 일어나십시오. 위대한 예언자들의 아들이여. 용기를 내십시오. 내가 당신과 함께 있건만 왜 슬퍼합니까?
- 오, 라헬, 당신이 나를 버리고 떠나면 혼자 있는 나를 볼 때 얼마나 무서운지! 당신의 부재는 나에게는 온갖 나쁜 일을
다 모아 놓은 것과 같으니, 당신이 나를 떠나지 못하고 또 내가 당신을 떠나지 못하도록 당신과 일치하기를 갈망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승살이에서는 가능하지 못하므로 내가 혼자 있다고 여겨질 때 영광의 하늘에서 당신과 일치하기를
간절히 청합니다.
- 당신이 그렇게 원하면 나는 당신을 떠나지 않겠고, 당신도 나를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 말해주십시오.
- 믿고 사랑하십시오.
- 이해가 안 됩니다.
